일제강점기 대표적 항일 농민운동인 신안 암태도 소작쟁의 운동이 올해로 8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역사의 현장을 더듬어 보고자 지난 3월 1일, 우리나라 항일정신의 상징인 3·1절날 암태도를 방문하였다. 광주방송국의 천명범 기자와 함께 동행하였고, 현장안내를 위해 문화원의 장명철(73세) 이사, 박존순(71세) 회원이 함께 하였다.
다시 생각하는 "암태도 소작쟁의"의 의미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3년 8월부터 24년 8월까지 전라남도 신안군(新安郡, 당시 무안군) 암태도(巖泰島)에서 벌어진 농민 항쟁이다. 암태도의 식민성 지주 문재철(文在喆)과 이를 비호한 일제에 대항하여 약 1년 간 소작쟁의를 벌였고, 결국 승리를 쟁취하였다.
암태도 농민운동은 단순한 소작쟁의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상적인 면에서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 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족운동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1919년 3·1운동에 놀란 일제는 1920년대 들어서 겉으로는 문화통치를 표방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철저한 민족말살정책을 폈고, 한국사회가 지니고 있는 공동체 문화를 분열시키기 위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특히 한국 농촌사회가 지니는 고유의 공동체 의식과 단결력을 해체시키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 되었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한국의 농촌사회 구조가 1920년대 들어 급격히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암태도 소작쟁의가 발생하였으니, 이는 단순한 지주에 대한 소작율 거부 운동차원이 아닌 항일운동의 성격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암태도 소작쟁의 과정에서 일본 경찰들은 지주의 편을 들어서 농민대표들을 모두 구속시키는데, 이에 대해서 보여주는 암태도 주민들의 단결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1차로 400여명이 배를 타고 목포경찰서에 가서 항의를 했고, 요구사항이 들어지지 않자 2차로 600명이 목포경찰서 앞에 집결해서 이른 아사동맹의 형태로 목숨을 내걸고 싸웠다. 그 결과 농민들의 요구에 따라 소작율은 낮춰지고 지도자들은 모두 석방되게 되었다.
일제는 농촌사회의 공동체적 의식을 분쇄하려는 정책을 폈지만, 암태도 농민들은 소작쟁의를 계기로 오히려 똘똘 뭉쳐 하나 되는 단결력을 보여준 것이다. 암태도 소작쟁의가 치열한 투쟁 끝에 결국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타지역 농민운동에 기폭제가 되고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왜 암태도에서 가장 먼저 소작쟁의가 먼저 시작되었나
그렇다면 왜 암태도에서 출발되었을까? 우리나라 최초의 소작쟁의 운동으로 평가되는 이 농민 운동이 평야지대가 많은 내륙지방이 아닌 서남해의 외딴 섬 암태도에서 먼저 발생하였는지 의문이 생긴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먼저 섬이라는 특수성이 농토에 대한 집착을 오히려 육지의 농민보다 더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암태도 주민의 사상적 개화(開化)가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암태도에는 소작쟁의가 발생하기 4년 전에 이미 암태사립학교가 만들어져서 동네 청년들의 의식화가 높아져 있었다(1928년 8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 또한 고 양은호 옹이 기록해 놓은 증언문에는 당시 서태석씨가 활동하는 서울 청년회 회원 세 사람이 암태도에 들어와 야학을 지도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암태도의 주민들은 이미 농민운동에 대한 사상적 무장이 이루어 진 상태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서태석'이라는 인물이 지도자로 주민을 이끌었고, 1919년 목포 4·8만세운동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박복영'이라는 인물의 배경도 주민의 단결력을 높였다. 이는 일제 당국이 이 사건을 함부로 취급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렇듯 암태도 소작쟁의는 섬이라는 특수한 지리적 조건에서, 인근 지역보다 먼저 의식화 된 농민들이 불합리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소작쟁의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97년에 건립된 암태도 소작인 항쟁기념탑
암태면 단고리 장고마을에 1997년 "암태도 소작인 항쟁기념탑"이 조성되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기념탑의 모습이 암태 면민들의 곧은 기상을 담고 있는 듯 하다. 암태도 소작쟁의의 의미는 이 기념탑에 새겨진 설명문에 잘 축약되어 있다. 소설 《암태도》를 집필한 송기숙 교수(전남대)의 글을 음미해보자.
탑명
1924년 암태도 소작인 항쟁은 동학농민전쟁이래 민족의 가슴속에 불타고있던 낡은제도와 외세에 대한 저항의 불길이 소작쟁의로 터져 나온 사건이다
일본제국주의의 비호를 받고있던 지주들이 소작료를 7∼8할까지 올려 받자 소작인들의 저항이 번져 가는 가운데 암태도 소작인들도 분연히 일어나 소작회를 조직하여 서태석씨와 박복영씨 중심으로 굳게 뭉쳐 지주와 맞섰다. 어느 곳 사람보다 일찍 깨쳐있던 암태도 소작인들은 면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아래 소작료 불납으로 버티고 파작동맹으로 대항하였다
끝내 양쪽이 크게 충돌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경찰은 이 사건을 빌미로 소작인들을 편파적으로 구속함에 분노가 폭발한 소작인들은 6-700명이 풍선으로 거친 파도를 헤치고 두차례나 목포에 나가 거리를 휩쓸고 검찰청을 점거하여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일제통치 기구에 대한 투쟁으로 변한 싸움이 날마다 크게 보도되자 전국민은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았고 소작인들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싸워 드디어 소작료를 4할로 내리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 불길은 전국에 번져 한국인 지주는 물론 일본인 지주들까지 왕조 때 보다 더 낮은 4할의 소작료 앞에 모두 굴복시켜 소작인들은 스스로 인간답게 살려는 역사적 성취의 발걸음을 한발 성큼 내딛었다. 농민투쟁 최초의 전국단위 승리였던 이 소작쟁의의 거룩한 불씨를 지폈던 조그마한 섬 여기 암태도 사람들은 민족사의 한가운데 그 모습이 의연하다. 그 위대한 항쟁정신은 이 탑 위에서 활화산으로 영원히 빛나리라
1997년 8월 글 송기숙
글씨 한자 우화 김정재
한글 유천 서종견
중앙에 우뚝 선 기념탑의 옆으로는 1924년 당시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암태도 소작쟁의를 지원해 준 각계 각층의 인사명단이 기록된 기념비(1998년 건립)도 세워져 있다. 이 명단에는 목포, 장성을 비롯한 인근 지역은 물론 서울, 평양에서도 후원한 사람들이 많이 있고, 심지어 일본에서 후원금을 보내준 교포들도 있다. 이를 통해서 암태도 소작쟁의 운동이 단순히 지역차원의 운동이 아닌 전 국민적, 한일간의 국제적 관심사였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
현장에서 우리 일행은 암태도 소작쟁의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명철 이사와 박존순 회원은 농민운동에 대한 여러 가지 구전과 주도 인물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였다. 더불어 몇 가지 개선할 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장명철 이사는 기념탑에서 기념행사가 개최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지난 1997년에 역사의 현장에 가까스로 기념탑이 세워지긴 했지만 지금까지 단 한번의 참배행사도 열리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립당시에는 면민 단합 대회 차원에서 제막식 행사를 치렀지만 이후 7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이 기념탑 앞에서는 단 한차례의 모임도 이루지지 못하고 있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큰 행사가 아니더라도 특정 일에 이곳에 면민들이 모여서 선조들의 정신을 되새기는 참배라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텐데,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점이 너무 안타깝다."
8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에도 역시 기념행사에 대한 논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실정이다. 80년 전 그 날의 뜨거웠던 함성이 세월의 무게 속에 묻혀 점점 잊혀져 가는 것이 아닌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또한 박존순 회원을 비롯한 지역민들은 암태도 소작쟁의가 외부 학자들에게 의해서 잘못 알려진 부분도 많다는 점을 지적했다. '서태석' 선생 같은 경우가 실질적인 지도자였고, 주민들의 정신적인 바탕이었음에도 그 평가가 매우 미약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태석' 선생 같은 훌륭한 분이 일제의 탄압으로 말년에 너무나 불행한 생을 살다가 돌아가신 점을 너무나 안타깝게 여긴다고 입을 모았다. 그분에 대한 재평가와 추모사업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는 바람도 잊지 않았다.
80주년을 맞아 찾아간 암태도 소작쟁의의 역사적 현장은 너무나 쓸쓸했다. 3·1절이었음에도 기념탑에는 분향조차 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암태도의 농민운동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이며, 문화적 자산이다. 지역의 한 극단에서 암태도를 주제로 한 마당극을 공연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더 나아가서 드라마나 영화도 제작되어 암태도 소작쟁의의 의미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