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검고, 물은 푸르다(山色黑 水色蒼)”, 조선후기에 제작된 흑산도 지도에 누군가 흑산도의 느낌을 색으로 친절하게 표시해 둔 내용이다. 망망대해에서 바라 본 흑산도는 유난히 검게 보이고 위압감이 느껴진다. 그 처지가 유배길에 오른 사람이라면 그 느낌이 남달랐을 것이다.
제주도, 거제도와 함께 3대 유배지로 활용된 흑산도에는 수많은 유배인들이 보내졌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손암 정약전(1758～1816)이다. 손암은 우이도와 흑산도를 오가면서 약 16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고, 우이도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현 우이도가 소흑산도라 불리면서 흑산도와 같은 권역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때문에 유배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두 섬을 오가면서 생활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곳에서 손암은 다른 학자들이 이룩하지 못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실학정신을 근간으로 한 자신의 학문세계에 바다와 섬 주민들의 생활상을 접목시킨 것이다. 해양을 무대로 살아가는 섬 주민들과의 교류는 “해양문화와 실학의 만남”이라는 시대정신의 반영으로 연결되었다.
손암은 긴 유배생활에 비해 그리 많은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다. 현재 확인된 흑산도시절 저술은 총 3종이다. 흑산도와 우이도 인근 해양어족의 생태를 정리 한 ‘자산어보(玆山魚譜)’, 우이도 어민 문순득의 표류경험담을 기술한 ‘표해시말(漂海始末)’, 조선후기 소나무 정책에 대한 ‘송정사의(松政私議)’가 바로 그것이다.
‘자산어보’는 21세기 신 해양시대를 맞이하면서 가장 주목받는 저술 중 하나이다. 해양생태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현시점에서 그 가치가 한층 빛나고 있다. 어족의 습성을 정리한다는 것은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도 혼자만의 연구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산어보는 철저하게 현장에서 어부들이 잡아 올린 물고기들을 보면서 확인을 해야 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그 지역 토박이들에게 물고기의 습성이나 생태에 대해서 전해들을 수 있어야 만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민의 표류경험담을 생생하게 정리한 ‘표해시말’은 최근에 실학계와 해양문학부분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손암이 우이도에 머물던 시절에 문순득이라는 홍어상인이 표류를 했다가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 등을 거쳐서 만 3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온 적이 있었는데, 손암은 그의 체험담을 듣고서 ‘표해시말’을 저술하였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외국배의 특성, 언어, 풍속 등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섬 주민의 경험담이 실학자의 관심분야와 어우러져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최부, 장한철의 표해록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표해록으로 손꼽히고 있다. ‘송정사의’는 당시 민폐가 많았던 소나무 관리 정책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정약전의 견해를 정리한 글이다. 외딴 섬에 유배와 있는 손암의 국가와 백성을 위한 마음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다.
수많은 유배인들 가운데 손암의 사례는 유배문화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유배문화의 이면에 담긴 문화사적인 의미를 재조명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섬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진 주민과 학자의 ‘만남과 교류’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이유로 현재 신안군에서는 손암이 서당을 열었던 흑산도 사리마을에 국내 최초로 유배문화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대개 섬 주민들에게 유배인물에 대해 인터뷰를 요청하면 별다른 애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잠시 머물다가 떠난 이방인으로 취급하기 쉽다. 그러나 정약전은 다르다. 20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인지 신안군 주민들은 유배인이었던 그를 서슴없이 신안의 대표적인 역사인물로 손꼽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