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정명여학교가 자교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행동을 했다.
정명여학교는 1903년 목포에 들어와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건립한 이 지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일제강점기 민족교육 산실이 되었다. 목포의 3·1운동인 "1919년 4·8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었고, 1930년대에는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불응하여 폐교조치까지 받아가면서도 민족지조를 지켜왔던 목포여성교육의 자부심이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민족정신을 계승하여 지역축제기간에 목포 4·8만세운동 재현행사를 대규모로 개최하여 지역민들의 많은 호응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자교의 전통을 학교를 알리는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전통을 중요시하며, 대외적으로 백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학교가 이번에 스스로 전통의 상징이 되는 건물을 체육관 건립 부지 확보를 이유로 철거해버리는 웃지 못할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정명여학교 운동장 한쪽에는 "유애나관"이라고 이름 붙여진 붉은 색 벽돌 건물 한 채가 보존되고 있었다. 이 건물은 1911년 정명여학교 5대 교장을 지낸 유애나(Mrs. J. S. Nisbet)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정명의 백년역사를 상징하는 유일한 보존 건물이었다.
'유애나'라는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다음은 정명여자중학교 홈페이지에 독립기념비와 관련하여 올려진 글 중의 일부이다.
"태극기는 정명학교 한문선생(곽우영)이 그려준 원형을 목판과 물감을 이용하여 정명학교 기숙사 및 지하실에서 수많이 만들어 냈다. 당시 교장은 유애나(Mrs. J. S. Nisbet) 선생인데 몸이 비대하고 신병이 있어 활동이 매우 부자유스러웠는데, 학생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태극기 만드는 것을 말리다가 계단에서 뒹굴어 넘어져서 병상에 눕게 되고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이듬해 1920년 2월 21일에 세상을 떴다(그의 무덤은 현재 광주에 있으며 1923년 봄에 정명동창회에서 묘비를 세웠다)."
학교측 스스로 홈페이지에 자랑스럽게 학교역사로 기록해 놓은 이 글에 따르면 유애나 교장은 1919년 4·8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고를 당했고, 그 후휴증으로 이듬해 사망했다. 이 건물은 그의 교육과 봉사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한마디로 '유애나관'을 철거한 행동은 학교의 전통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을 정명여학교가 스스로가 없애 버리는 어리석음 범한 꼴이 되었다.
물론 정명여학교 내부적으로 이 문제를 결정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학교의 오랜 숙원이었던 체육관 건립을 위해서 예산상의 부족이 가장 현실적인 문제였을 것이라는 점도 이해는 간다. 필자는 정명여학교 측과 함께 4·8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함께 기획하였고, 여러 교사들과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어 학교의 재단형편이나 학교가 체육관 건립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었는가를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 번 이해하려고 해도, 이번 결정은 상식 밖의 처사이다.
대외적으로는 백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있으면서, 내적으로는 이런 상식 밖의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 도무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측에서는 예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기저기 나름대로 도움을 요청했다고 하는데, 정작 중요한 건물의 보존가치에 대한 전문가들의 자문은 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금전적인 논리가 문화유산의 보존 가치를 깔아 뭉개버린 것이다.
정명여학교가 보존건물에 대한 인식의 무지를 보여준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얼마 전 문화재청은 정명여학교에 남아 있는 사택건물을 등록문화재(정식문화재가 아닌 보존을 위한 가지정 문화재)로 지정을 했다. 이 선교사 건물은 화재로 인해 원래 건물의 반쪽 정도만 남아 있었는데, 등록문화재로 지정 받기 몇 해 전에 학교측에서 전문가 자문을 구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어설픈 보수공사를 실시해 꼴불견의 요상한 건물로 복원을 시켜버린 적이 있었다. 이로 인해 사실상 이 건물은 문화재로 보존가치를 상실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지적이다. 뒤늦게 등록문화재라도 지정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어떻게 등록문화재가 되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원형을 망쳐버렸다.
이 건물보다도 오히려 이번에 철거된 '유애나관' 건물이 훨씬 더 보존가치가 높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철거된 건물에 대한 실측기록이 남겨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근 목포문화원에서는 목포대 김지민 교수(건축공학과, 문화재전문위원)를 책임연구원으로 하여 목포지역 근대건축물 중 보존 가치가 있는 건물에 대한 세부실측 작업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아직 '유애나관'에 대한 세부실측은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얼마 전 김지민교수가 '유애나관' 실측조사를 위해 학교를 방문했을 때 이 건물이 이미 철거되고 있었다고 한다. 근대건축물에 대한 실측조사 사업은 이런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실시하고 있던 사업이었는데, '유애나관'은 건물에 대한 세부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문제는 비단 정명여학교 학교만의 문제로 끝날 일은 아니다. 목포지역에는 아직 보존가치가 높은 건물들과 향토문화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다. 언제 어느 곳에서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법적인 근거는 이미 몇 년 전에 마련이 되었다. 지난 2001년 10월 15일자로 공포된 『목포시 문화유산 보호조례』가 바로 그것이다. 이 조례는 목포시의회 본회의(제207회 제2차)에서 강성휘 의원이 발의하여 상정한 것으로 목포시에 산재되어 있는 유·무형의 향토문화유산에 대한 자치적인 법적 보호장치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이 조례안을 상정할 당시 강성휘 의원은 필자에게 자문을 요청했고, 필자 또한 이러한 조례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기초안을 작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면서 강의원에게 부탁했던 것은 조례안을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조례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례의 골자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국가나 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 지역문화유산 가운데 보존가치가 높은 문화자원을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해 체계적인 보호와 관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문화유산보호위원회를 설치하여 지역문화유산에 대한 연구와 조사를 실시하고 새로운 문화재를 발굴해 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조례안이 공포 시행된 지 2년이 지나는 동안 목포시에서는 단 한번도 문화유산위원회를 소집한 적이 없다. 조례안이 만들어지고 나서 위원들에게 우편으로 위촉장만 덜렁 전달한 것이 고작이었다.
어쩌면 그 결과가 이번 정명여학교 측의 일방적인 '유애나관' 철거라는 상황까지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다.
유달산에 올라가서 정명여학교를 바라보면, 큰 본관 건물보다도 작고 아담한 붉은 색의 "유애나관"이 먼저 시선에 들어온다. 필자는 유달산에 목포풍경을 바라보며 외지인들에게 목포역사를 설명할 때는 언제나 "저 붉은 색 건물 보이시죠. 바로 저 학교가 목포민족교육의 산실인 정명여학교입니다"라고 설명을 해 왔다. 앞으로는 무엇으로 정명여학교를 찾아야 할지 아쉬운 마음이다.
현재 정명여학교는 학교 백년사 발간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정말이지 궁금해진다. 학교의 역사를 기록하는 백년사에 이번 '유애나관' 철거를 어떻게 설명할지.
"백주년 기념하여, 유애나관 철거하다"이런 문구가 어울리지 않을까?
밖으로는 학교의 전통을 홍보하고, 안으로는 학교의 전통을 허물어 버리는 정명여학교의 이중성에 강한 회의감이 더해간다.
